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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말에 대해

기획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말에 대해

기획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말에 대해 어제 들은 말 "기획이요? 솔직히 누구나 할 수 있지 않나요?" 신입 개발자가 던진 말이다. 악의는 없었다.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은 거였다. 나도 안다. 그래도 순간 멍했다. 6년이다. 6년 동안 뭘 배웠나 싶었다. 점심시간에도 그 말이 맴돌았다. 퇴근길에도. 집에 와서도. 그래서 쓴다. 정리하고 싶다. 나한테도 설명하고 싶다.누구나 할 수 있다는 착각 처음 듣는 말은 아니다. 대학생도 말한다. 마케터도 말한다. 심지어 대표님도 가끔. "이거 기획서 간단한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려?" 간단해 보인다는 거다. 화면 몇 개 그리고. 버튼 위치 정하고. 그게 전부 아니냐고. 맞다. 결과물만 보면 간단하다. A4 20장. 피그마 파일 하나. 그게 전부처럼 보인다. 근데 그 뒤에 뭐가 있는지 모른다. 안 보인다. 안 보이니까 없는 줄 안다. 작년에 결제 플로우 개선 기획했다. 최종 산출물은 화면 8개. 간단해 보였다. 근데 그 전에:경쟁사 7개 앱 결제 플로우 분석 (이틀) 유저 인터뷰 12건 (일주일) CS 데이터 분석 300건 (사흘) 이탈률 구간별 분석 (이틀) 개발 공수 산정 3번 (각각 다른 방식) 법률 검토 (PG사 담당자 미팅 2번) 디자이너랑 와이어프레임 10번 수정 이해관계자 설득 미팅 4번총 3주 반. 화면 8개 나오는 데 3주 반. 이게 보이나. 안 보인다. 결과물만 본다. 그래서 쉬워 보인다.기획이 아니라 의사결정이다 기획자가 하는 일. 화면 그리는 게 아니다. 의사결정이다. 매일 수십 개 결정한다:이 기능 넣을까 말까 A안 B안 중 뭘 선택할까 이번 스프린트에 들어갈까 우선순위가 높을까 낮을까 개발 공수 대비 효과가 있을까 유저가 진짜 원하는 걸까 비즈니스 목표와 맞을까하나하나가 결정이다. 그리고 각각 근거가 필요하다. "왜 이렇게 기획했어요?"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매번. 개발자한테. 디자이너한테. 대표님한테. PM한테. "그냥요"는 없다. "느낌상요"도 없다. 데이터 보여줘야 한다. 로직 설명해야 한다. 지난주 상품 상세 개편 기획했다. 리뷰 섹션을 위로 올릴지 말지. 간단한 결정 같다. 근데:현재 리뷰 클릭률 8.2% 리뷰 본 유저의 구매 전환율 23% (안 본 유저 12%) 스크롤 도달률 상위 3개 섹션 분석 경쟁사 5곳 리뷰 배치 비교 A/B 테스트 시나리오 2가지 개발 공수 각각 3일, 5일이 정도 준비하고 회의 들어간다. 그래야 "그냥 위로 올려보면 어때요?"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나. 이런 결정을. 보이지 않는 6년 1년 차 때는 몰랐다. 화면만 그렸다. 예쁘게 그리면 됐다. 2년 차. 개발자가 물었다. "이거 예외 케이스는요?" 뭔 예외. 그냥 로그인하면 되지. 근데 아니었다:비밀번호 틀리면? 계정 잠금되면? 소셜 로그인 토큰 만료되면? 네트워크 끊기면? 기기 변경했으면? 탈퇴 후 재가입이면?로그인 하나에 경우의 수가 20개였다. 그때 알았다. 기획이 화면 그리기가 아니라는 걸. 3년 차. 데이터 보기 시작했다. SQL 배웠다. 쿼리 짜는 건 못해도 읽을 순 있다. 유저 행동 데이터 보니까 달랐다. 내가 생각한 플로우로 안 움직인다. 메인에서 상세로 간다고 생각했다. 근데 30%는 검색에서 바로 상세로 간다. 20%는 푸시 알림에서. 15%는 URL 직접 접근. 시작점이 다르면 컨텍스트가 다르다. 같은 화면이어도 다르게 기획해야 한다. 4년 차. 우선순위를 배웠다. 다 중요하다. 근데 다 못 한다. 개발 리소스는 한정됐다. 이번 분기 목표는 정해졌다. 뭘 먼저 할까. RICE 스코어링 배웠다. ICE 모델도. 근데 공식만으론 안 됐다. 정치도 있다. 파워게임도. CEO가 원하는 기능. 개발팀이 싫어하는 기능. 유저는 원하는데 매출은 안 나는 기능. 어떻게 조율할까. 어떻게 설득할까. 이게 기획자 일이었다. 5년 차. 실패를 배웠다. 기획한 기능 3개 중 2개는 실패다. 쓰레기 기능 만들었다. 아무도 안 쓴다. DAU 0.8%. 개발 3주 걸렸는데. 왜 실패했나. 가설이 틀렸다. 유저 니즈를 착각했다. 검증 없이 밀어붙였다. 이것도 배움이다. 실패 안 해본 기획자 믿기 힘들다. 6년 차. 지금. 시스템으로 본다. 한 기능이 다른 기능에 영향 준다. 푸시 알림 하나 추가하면:알림 센터 UI 수정 알림 설정 메뉴 추가 푸시 발송 로직 개발 CS 응대 가이드 작성 앱 용량 증가 (SDK 추가) 배터리 소모 테스트 개인정보처리방침 수정하나가 아니다. 연결돼 있다. 전체를 봐야 한다. 이게 6년이다. 보이지 않는 6년.전문성이라는 것 의사가 "의학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들으면 어떨까. 변호사가 "법률은 간단하다"고 들으면. 개발자가 "코딩은 쉽다"고 들으면. 화낼 거다. 당연히. 근데 기획자는 참는다. 웃으면서 "네, 쉬워 보이죠"라고 한다. 왜. 왜 우리는 전문성을 주장 못 할까. 코드는 보인다. 복잡함이 보인다. 법률 용어는 어렵다. 의학 용어는 더 어렵다. 근데 기획은 한글이다. 평범한 말로 쓴다. 그래서 쉬워 보인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쉬운 말로 복잡한 걸 설명하는 게 기획이다. 어렵게 쓰면 못하는 거다. 좋은 기획서는 중학생도 이해한다. 근데 그 기획서 나오기까지는 중학생이 못 한다. 전문성은 결과물의 복잡함이 아니다. 과정의 깊이다. 설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제 그 신입 개발자. 오늘 다시 만났다. "어제 그 말,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요." "아니다. 괜찮다." 근데 괜찮지 않았다. 그래서 말했다. "기획이 쉬워 보이는 거, 이해한다. 근데 한 번 해볼래?" "네? 제가요?" "다음 주 소셜 공유 기능. 기획해봐. 화면 3개면 된다. 간단하다." 얼굴이 굳었다. "저는... 기획 안 해봐서..." "누구나 할 수 있다며." 침묵. 길었다. "농담이다. 근데 진짜 해봐. 도와줄게. 뭐가 어려운지 직접 느껴보면 좋겠다." "...해볼게요." 이게 답이다. 말로 설명 안 된다. 직접 해봐야 안다. 기획자의 전문성. 말로 증명 안 된다. 포트폴리오로 보여줘야 한다. "이 기능 제가 기획했는데요, MAU 30% 올랐어요." "이거 제가 개선해서 이탈률 15% 줄었어요." "A/B 테스트 10번 돌려서 이 안 찾았어요." 숫자로 말해야 한다. 결과로 보여줘야 한다. 그래도 배워야 하는 것들 6년 차인데도 모르는 게 많다. SQL 더 잘하고 싶다. 쿼리 직접 짜고 싶다. 개발자 괴롭히기 싫다. 데이터 분석 더 배우고 싶다. 코호트 분석. 퍼널 분석. 툴만 다루는 게 아니라 인사이트 뽑고 싶다. UX 리서치 제대로 배우고 싶다. 유저 인터뷰 더 잘하고 싶다. 편향 없이 질문하고 싶다. 비즈니스 감각 키우고 싶다. 매출 구조 이해하고 싶다. 단가, 마진, LTV, CAC. 숫자로 말하고 싶다. 개발 프로세스 더 알고 싶다. API 구조. 데이터베이스 설계. 그래야 현실적인 기획 나온다. 배울 게 산더미다. 6년 했는데도. 12년 차 선배 보면 더 멀다. 누구나 할 수 있다고? 6년 배우고도 부족한데. 인정받는 방법 결국 실력이다. 말로 안 된다. 좋은 기획 하나가 백 마디 설명보다 낫다. 성공한 프로젝트 하나가 증명이다. 그래서 열심히 한다. 경쟁사 앱 분석한다. 유저 리뷰 읽는다. 데이터 본다. 주말에 PM 책 읽는다. 온라인 강의 듣는다. 사이드 프로젝트 기획한다. 이게 전문성이다. 계속 배우는 것. 계속 고민하는 것. "기획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말. 반은 맞다. 누구나 시작할 수 있다. 맞다. 진입장벽이 낮다. 맞다. 근데 잘하는 건 다르다. 지속하는 건 다르다. 깊이 파는 건 다르다. 누구나 피아노 칠 수 있다. 건반 누르면 소리 난다. 근데 피아니스트는 아무나 못 된다. 누구나 글 쓸 수 있다. 한글 안다. 근데 작가는 아무나 못 된다. 기획도 같다. 누구나 할 수 있다. 근데 잘하는 건 다르다. 오늘의 결론 그 신입 개발자. 사실 고맙다. 질문 던져줘서. 덕분에 정리했다. 내가 뭘 배웠는지. 뭘 하는지. 6년. 길다면 길다. 짧다면 짧다. 근데 분명 배운 게 있다. 의사결정하는 법. 우선순위 정하는 법. 데이터 읽는 법. 사람 설득하는 법. 실패 받아들이는 법. 이게 기획자다. 화면 그리는 사람 아니다. 의사결정하는 사람이다. 내일 출근하면 또 듣겠지. "이거 왜 이렇게 기획했어요?" 괜찮다. 답할 수 있다. 근거 있다. 데이터 있다. 그게 전문성이다. 6년이 준 것.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해봐. 해보고 말해.기획은 쉽지 않다. 그래서 계속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