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록을 꼼꼼히 쓰는 이유 - 말이 바뀌기 때문이다

회의록을 꼼꼼히 쓰는 이유 - 말이 바뀌기 때문이다

회의록을 꼼꼼히 쓰는 이유 - 말이 바뀌기 때문이다

오전 10시, 또 회의다

회의실에 들어갔다. 대표님, 개발팀장, 디자인 리드, 마케팅 매니저. 나까지 다섯 명.

“이번 기능은 간단해요.”

대표님이 말했다. 간단하다는 말을 들으면 긴장한다. 간단한 게 없다는 걸 6년 차가 가르쳐줬다.

노트북을 켰다. Confluence 새 페이지. 제목은 “2025-01-XX 신규 기능 논의”. 템플릿은 항상 같다.

  • 일시/참석자
  • 안건
  • 논의 내용
  • 결정 사항
  • TODO

타이핑을 시작했다. 대표님 말씀을 그대로 적는다.

“유저가 클릭 한 번으로 바로 결제까지 가게. 네이버페이, 카카오페이 다 붙이고.”

개발팀장이 말했다. “결제 모듈 연동은 2주 걸려요.”

“그럼 1주 만에 할 수 있는 걸로 먼저 하시고.”

적었다. “개발 기간: 1주 목표 (결제 모듈 단순화)”

이게 나중에 중요하다.

3일 뒤, 말이 바뀌기 시작한다

슬랙 DM이 왔다. 대표님.

“K씨, 결제 기능에 쿠폰 적용도 넣어야 할 것 같은데요?”

심장이 철렁했다. 회의록을 열었다. Ctrl+F로 “쿠폰” 검색. 없다.

답장을 보냈다.

“회의 때는 쿠폰 얘기가 없었는데, 추가하시는 건가요? 개발 범위가 달라져서 일정 체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회의록 링크를 첨부했다.

5분 뒤 답장.

“아 그랬나? 그럼 다음 스프린트에.”

회의록이 없었으면 어땠을까. “그때 말씀하셨잖아요” 싸움이 시작됐을 것이다. 증거가 있으니 조용히 넘어간다.

이게 회의록의 첫 번째 이유다. 말이 바뀐다.

사람은 자기 말을 기억 못 한다

이건 악의가 아니다. 정말로 기억을 못 한다.

지난달에도 있었다. 마케팅 매니저가 회의에서 말했다.

“배너는 메인 상단에만 하나 넣으면 돼요. 심플하게.”

회의록에 적었다. “메인 배너 1개, 상단 고정”

디자이너가 시안 만들었다. 개발자가 구현했다. QA 들어갔다.

그런데 마케팅 매니저가 지라 티켓에 댓글을 달았다.

“배너가 하나밖에 없네요? 중간이랑 하단에도 필요한데요.”

나는 회의록을 복사해서 댓글로 달았다.

“회의록 확인 부탁드립니다. 당시 1개로 합의하셨습니다. 추가 필요 시 백로그에 등록하겠습니다.”

30분 뒤 댓글.

“아 맞다. 제가 착각했네요. 다음에 추가해요.”

사람들은 정말로 자기가 뭐라고 했는지 모른다. 특히 회의가 많으면 더 그렇다. 하루에 회의 세 개 하면 내용이 섞인다.

그래서 나는 회의 끝나고 30분 안에 회의록을 올린다. 기억이 선명할 때.

회의록은 방어 수단이다

기획자는 중간에 낀다. 위로는 대표님, 옆으로는 마케팅, 아래로는 개발/디자인.

모두가 다른 말을 한다. 그리고 나중에 “왜 이렇게 됐어요?”라고 묻는다.

이럴 때 회의록이 방패다.

작년에 있었던 일. 신규 기능 출시 후 버그가 터졌다. 심각한 건 아닌데, UX가 이상했다.

대표님이 물었다. “이거 왜 이렇게 기획했어요?”

나는 회의록을 열었다. 3개월 전 회의.

“당시 개발 리소스 부족으로, 대표님께서 ‘MVP로 먼저 출시하고 개선하자’고 하셨습니다. 회의록 3번 항목입니다.”

대표님이 회의록을 읽었다.

“아, 맞네. 그럼 이번에 개선하죠.”

끝.

회의록이 없었으면 나는 “기획을 왜 이렇게 했냐”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회의록이 있으니 “당시 상황이 그랬구나”로 바뀐다.

Confluence에 남기는 이유

회의록을 어디 남길까. 선택지는 많다. 노션, 구글 독스, 슬랙, 이메일.

나는 Confluence를 쓴다. 이유는 세 가지.

첫째, 검색이 쉽다. Confluence 검색창에 키워드만 치면 관련 회의록이 다 나온다. “결제 기능” 검색하면 결제 관련 회의 5개가 시간순으로 나온다.

둘째, 버전 관리가 된다. 누가 언제 뭘 수정했는지 다 남는다. “아 제가 회의록을 수정했는데요”라는 변명이 안 통한다.

셋째, 권한 설정이 명확하다. 팀 단위로 공유 설정. 전사 공개도 가능. 필요한 사람만 볼 수 있게.

슬랙은 흘러간다. 이메일은 묻힌다. 노션은 개인적이다. Confluence는 공식 기록이다.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논의된 내용”을 찾을 때, 사람들은 Confluence를 연다. 그래서 회의록도 거기 둔다.

템플릿이 중요하다

회의록을 매번 처음부터 쓰면 힘들다. 그래서 템플릿을 만들었다.

# 회의 제목
일시: 2025-01-XX 10:00-11:00
참석자: @대표님 @개발팀장 @디자이너 @기획자K
작성자: 기획자K

## 안건
- [ ] 신규 기능 범위 확정
- [ ] 일정 논의

## 논의 내용
### 1. 기능 범위
- 대표님: "클릭 한 번으로 결제까지"
- 개발팀장: "결제 모듈 연동 2주 소요"
- 결론: 1차는 단순 결제만. 쿠폰/포인트는 2차.

### 2. 일정
- 목표: 2주 내 개발 완료
- QA: 3일
- 배포: 2025-02-15

## 결정 사항
1. 결제 기능 MVP로 개발 (네이버페이, 카카오페이만)
2. 디자인 시안 이번주 금요일까지
3. 개발 착수 다음주 월요일

## TODO
- [ ] @디자이너: 결제 화면 시안 (금요일까지)
- [ ] @개발팀장: 결제 모듈 기술 검토 (수요일까지)
- [ ] @기획자K: 상세 스펙 문서 작성 (목요일까지)

## 다음 회의
- 일시: 2025-01-XX 14:00
- 안건: 디자인 시안 리뷰

이 템플릿을 쓰면 10분 만에 회의록이 완성된다. 회의 중에 논의 내용만 타이핑하면 된다.

중요한 건 “누가 뭐라고 했는지”를 명확히 적는 것이다. “결제 기능을 추가하기로 했다”가 아니라 “대표님이 결제 기능 추가를 요청했고, 개발팀장이 2주 소요 예상했고, MVP로 합의했다”고 쓴다.

나중에 누가 뭐라고 하면 이 문장을 가리킨다.

회의 중 타이핑은 실례가 아니다

예전에는 회의 중에 노트북 치는 게 실례인가 싶었다. 다들 얘기하는데 나만 타닥타닥.

그런데 지금은 당당하다. 회의 시작할 때 말한다.

“회의록 작성하겠습니다.”

아무도 뭐라고 안 한다. 오히려 좋아한다. 회의 끝나고 “회의록 언제 올라와요?”라고 묻는다.

회의록을 안 쓰면 더 이상하다. “그때 뭐라고 했더라?” 싸움이 시작된다.

개발자들은 특히 좋아한다. 회의 내용을 나중에 다시 안 물어봐도 되니까. 디자이너도 좋아한다. 요구사항이 명확하니까.

회의록은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팀 전체를 위한 것이다.

말이 바뀌는 순간들

경험상 말이 바뀌는 타이밍은 정해져 있다.

1. 개발이 50% 진행됐을 때 “아 그거 이렇게 하는 거 아니었는데요?”

2. QA에서 버그가 나왔을 때 “이건 버그가 아니라 스펙이 잘못된 거 아닌가요?”

3. 출시 직전 “근데 이거 빠뜨린 게 있는 것 같은데요?”

4. 출시 후 유저 반응이 안 좋을 때 “왜 이렇게 기획했어요?”

이럴 때마다 회의록을 연다. 그리고 조용히 링크를 공유한다.

“당시 회의록입니다. 3번 항목 확인 부탁드립니다.”

더 이상 논쟁이 없다. 팩트가 있으니까.

회의록을 안 쓰면 생기는 일

신입 때 회의록을 대충 썼다. 귀찮았다. 빨리 기획서 쓰고 싶었다.

그러다가 크게 데였다.

대표님이 요청한 기능을 개발했다. 2주 걸렸다. 배포했다.

그런데 대표님이 말했다. “이거 제가 요청한 거 아닌데요?”

증거가 없었다. 회의록이 없었다. 슬랙 대화도 지워져 있었다.

결국 내가 “제가 잘못 이해했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2주 개발이 물거품이 됐다. 개발자는 화났다. 나도 억울했다.

그 이후로 회의록을 빠짐없이 쓴다. 30분짜리 회의도 쓴다. 5분짜리 스탠드업도 쓴다.

귀찮지만 안전하다.

회의록 작성 루틴

나는 회의가 끝나면 바로 회의록을 쓴다. 30분 안에.

1시간 회의면 회의록 작성에 15분. 30분 회의면 10분.

회의 중에 이미 70%는 타이핑했으니, 나머지 30%만 정리하면 된다.

  • 두괄식으로 수정
  • 결정 사항 볼드 처리
  • TODO에 담당자 태그
  • 다음 회의 일정 추가

그리고 슬랙에 공유한다.

“오늘 회의록입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수정 사항 있으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24시간 안에 아무 말 없으면 확정. 이후 수정 요청은 받지 않는다.

이게 규칙이다.

디테일이 생명이다

회의록은 디테일이 중요하다.

“결제 기능 추가하기로 함” - 이건 안 된다.

“대표님 요청으로 결제 기능 추가. 네이버페이/카카오페이만 1차 적용. 개발 2주 예상. 디자인 시안 금요일까지. 개발팀장 기술 검토 후 최종 일정 확정 예정.” - 이게 회의록이다.

누가, 무엇을, 언제까지, 왜, 어떻게. 5W1H.

특히 “왜”가 중요하다. 결정의 이유를 적어둔다.

“쿠폰 기능은 2차로 미룸 (개발 리소스 부족, 우선순위 낮음)”

이 한 문장이 나중에 “왜 쿠폰 기능이 없어요?” 질문을 막아준다.

회의록은 CYA다

CYA. Cover Your Ass.

영어권에서 쓰는 표현이다. “네 엉덩이를 보호해라.”

회의록은 정확히 이거다. 내 책임을 명확히 하고, 남의 책임도 명확히 한다.

“K씨가 기획을 잘못한 거 아니에요?” - “당시 회의에서 이렇게 결정됐습니다.”

“개발이 왜 이렇게 오래 걸려요?” - “회의록에 2주로 합의됐습니다.”

“디자인이 왜 이래요?” - “시안 리뷰 때 승인하셨습니다.”

회의록은 모두를 보호한다. 나만이 아니라.

회의록을 쓰지 않는 사람들

회사에는 회의록을 안 쓰는 사람들이 있다.

“머리로 다 기억해요.” - 기억은 변한다.

“중요한 거만 메모해요.” - 뭐가 중요한지 나중에 바뀐다.

“바빠서 시간이 없어요.” - 나중에 더 바빠진다.

이 사람들은 나중에 고생한다. “그때 제가 뭐라고 했죠?” 물어본다. 기억이 안 난다.

회의록은 미래의 나를 위한 투자다. 지금 30분 쓰면, 나중에 3시간을 아낀다.

회의록이 쌓이면

Confluence에 회의록이 수십 개 쌓였다. 검색하면 프로젝트 히스토리가 보인다.

“이 기능 왜 이렇게 됐더라?” - 회의록 3개를 읽으면 안다.

“작년에 비슷한 거 했던 것 같은데?” - 검색하면 나온다.

회의록은 팀의 기억이다. 조직의 기록이다.

신입이 오면 회의록부터 읽으라고 한다. 프로젝트 맥락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결론

회의록을 꼼꼼히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

말이 바뀌기 때문이다.

사람은 악의 없이 기억을 왜곡한다. 나도 그렇고, 대표님도 그렇고, 개발자도 그렇다.

회의록은 객관적 기록이다. 팩트다. 증거다.

Confluence에 회의록을 남기는 건 기획자의 기본이다. 귀찮지만 필수다.

회의록이 없으면 싸운다. 회의록이 있으면 조용하다.

나는 오늘도 회의록을 쓴다. 내일의 나를 위해서.


회의 끝. 회의록 쓴다. 30분 안에 올린다. 이게 루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