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가 마케터라서 좋은 점, 어려운 점
- 16 Dec, 2025
저녁 8시, 합정동 카페
남자친구가 늦는다고 문자 보냈다. 광고 캠페인 론칭이래. 나도 스프린트 마지막 주라 7시에 겨우 퇴근했다.
카페에 먼저 와서 노트북 켰다. 지라 티켓 정리. 내일 개발자한테 물어볼 거 메모. 그가 도착했을 때 나는 피그마를 보고 있었다.
“또 일해?” 그가 웃으며 말했다. “너도 노트북 가방 메고 왔잖아.” 나도 웃었다.
우린 둘 다 안다. 저녁 약속이라고 일을 완전히 떠날 수 없다는 걸.

같은 팀 같지만 다른 팀
그와 사귄 지 2년. 둘 다 비즈니스 직군이라 통하는 게 많다. 회사 구조, 정치, 스트레스.
그런데 관점은 완전히 다르다.
그는 마케터다. 퍼포먼스 마케팅팀. 매일 광고 대시보드 본다. CPC, CVR, ROAS. 숫자로 성과 나온다. A/B 테스트 돌리고, 캠페인 최적화하고, 예산 분배한다.
나는 기획자다. 프로덕트 오너. 유저 플로우 그린다. 백로그 관리한다. 개발자, 디자이너랑 협업한다. 성과는… 글쎄. 릴리즈하고 한참 뒤에 알 수 있다.
지난주 저녁. 내가 말했다. “오늘 개발자가 또 스펙이 명확하지 않다고 했어. 다시 정리해야 돼.”
그가 말했다. “스펙을 명확하게 못 줬으면 네 잘못 아니야?”
순간 화났다. 그런데 그는 악의가 없었다. 마케터 관점에선 당연한 말이다. 캠페인 브리프가 불명확하면 대행사가 못 하니까.
나는 설명했다. “기획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개발하면서 바뀌는 거야. 기술적 제약도 있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다는 표정이었지만, 완전히 이해할 순 없다는 것도 알았다.
나도 그의 일을 완전히 이해 못 한다. 그가 “CPA가 너무 높아서 스트레스야”라고 하면,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정확히 얼마나 심각한지는 모른다.

서로의 일을 이해한다는 것
좋은 점도 많다.
회사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친구들한테 얘기하면 “그게 뭔데?”부터 설명해야 한다. 그는 안다. 스프린트가 뭔지, 백로그가 뭔지, KPI가 뭔지.
그도 나한테 말한다. 광고 소재 테스트 결과, 타겟 오디언스 세그먼트, 퍼널 최적화. 나는 대충 이해한다. 완벽하진 않지만, 공감은 할 수 있다.
한 달 전이었다. 내가 기획한 기능이 드디어 릴리즈됐다. 3개월 걸렸다. 개발 일정 지연, 디자인 수정, 이해관계자 설득. 힘들었다.
그날 저녁, 그가 꽃을 사왔다. “고생했어. 알아, 얼마나 힘들었는지.”
눈물 날 뻔했다. 회사에서는 아무도 몰라준다. 대표님은 “다음 기능은 언제 돼요?”만 물어본다. 개발자들은 이미 다음 스프린트에 집중한다.
그런데 그는 안다. 기획자가 릴리즈까지 가는 게 얼마나 험난한지.

균형이 어렵다
문제는 균형이다.
저녁에 만나도 일 얘기를 한다. 자연스럽게 나온다. “오늘 회의가 지옥이었어”, “대표님이 또 우선순위를 바꿨어”, “광고 성과가 안 나와서 미치겠어”.
처음엔 괜찮았다. 서로 공감하고, 조언하고, 위로했다.
그런데 요즘은 피곤하다.
지난 토요일. 우린 한강에 갔다. 돗자리 깔고 누웠다. 그가 핸드폰을 봤다. 광고 대시보드였다.
“주말인데.” 내가 말했다. “응, 그냥 확인만.” 그가 대답했다.
나도 노트북을 가져왔다. 월요일 스프린트 계획. 그가 눈치챘다.
“너도?” “응. 그냥 정리만.”
우린 웃었다. 자조적으로.
저녁엔 논현동 맛집에 갔다. 파스타가 맛있었다. 그런데 그가 말했다.
“여기 마케팅 잘하네. 인스타 광고 봤어. 크리에이티브가 좋더라.”
나는 말했다. “앱 UX가 별론데. 예약 플로우가 너무 복잡해.”
우린 각자의 관점으로 세상을 본다. 맛집도 일의 연장이 된다.
집에 돌아와서 그가 말했다. “우리 일 얘기 좀 덜 하자.”
나도 동의했다. “응. 주말엔 일 금지.”
그런데 지키기 어렵다. 일이 우리 삶의 큰 부분이니까.
다른 관점이 주는 것
싸운 적도 있다.
내가 새로운 기능을 기획했다. 유저 리서치 결과, 데이터 분석, 경쟁사 벤치마킹. 3주 걸렸다.
그한테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그가 말했다.
“이거 마케팅으로 푸시할 수 있어? 유저한테 어떻게 알릴 건데?”
순간 멈췄다. 생각 안 했다.
화가 났다. “아직 개발도 안 들어갔는데 벌써 마케팅?”
그가 말했다. “기능 만들어도 유저가 모르면 의미 없잖아. GTM 전략은 생각했어?”
말이 맞았다. 그런데 인정하기 싫었다.
“너는 기획을 몰라서 그래. 일단 만들고 생각하는 거야.” “너는 마케팅을 몰라서 그래. 만들기 전에 생각해야지.”
우린 서로 쳐다봤다. 둘 다 틀리지 않았다. 둘 다 맞았다.
결국 내가 말했다. ”…다음부턴 GTM도 같이 생각할게.”
그가 웃었다. “나도 기획 관점 배울게.”
싸움이 배움이 됐다.
지금은 기획할 때 그한테 먼저 보여준다. 그는 마케터 관점에서 피드백 준다. “이 기능, 유저한테 어떻게 설명할 거야?”, “이 문구, 광고 카피로 쓸 수 있어?”, “이 플로우, 전환율 생각했어?”
나도 그의 캠페인 기획서를 본다. 기획자 관점에서 피드백 준다. “이 랜딩페이지, UX가 별론데”, “CTA 버튼이 너무 많아”, “유저 플로우가 자연스럽지 않아”.
우린 서로를 보완한다. 완벽하진 않지만, 시도한다.
경계선 긋기
한 달 전, 우린 규칙을 만들었다.
- 평일 저녁 9시 이후 일 얘기 금지.
- 주말 중 하루는 완전 디지털 디톡스.
- 데이트 중 회사 슬랙 확인 금지.
지키기 어렵다. 특히 릴리즈 주간이나 캠페인 론칭 기간엔 불가능하다.
그래도 노력한다.
지난주 목요일. 내가 개발자랑 싸웠다. 스펙 해석 문제였다. 스트레스 폭발.
저녁에 그를 만났다. 쏟아내고 싶었다. 그런데 시계를 봤다. 9시 5분.
“오늘 힘들었어?” 그가 물었다. “응. 그런데 9시 넘어서. 내일 얘기할게.”
그가 내 손을 잡았다. “괜찮아. 힘들면 얘기해.”
결국 얘기했다. 규칙을 깼다. 그런데 괜찮았다. 완벽하게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 유연하게 조정한다.
지난 일요일. 우린 경복궁에 갔다. 핸드폰을 호텔에 두고 왔다. 둘 다.
처음엔 불안했다. 슬랙 알림 올 텐데. 긴급한 거 있으면 어쩌지.
그런데 30분 지나니 괜찮았다. 세상은 돌아간다. 내가 없어도.
우린 걸었다. 단풍을 봤다. 커피를 마셨다. 일 얘기를 안 했다.
저녁에 호텔로 돌아와서 핸드폰을 켰다. 슬랙 알림 37개. 그의 핸드폰도 마찬가지.
우린 웃었다. “내일 보자.” “응. 내일.”
그날 밤, 우린 그냥 사람이었다. 기획자도, 마케터도 아니었다. 그냥 우리.
아직 배우는 중
완벽하지 않다. 여전히 일 얘기를 너무 많이 한다. 여전히 저녁에 노트북을 연다. 여전히 서로의 관점이 부딪친다.
그런데 괜찮다. 우린 배운다.
그는 내가 스프린트 회고할 때 스트레스받는 걸 안다. 그날 저녁엔 좋아하는 디저트를 사온다.
나는 그가 광고 성과 안 나올 때 예민해지는 걸 안다. 그럴 땐 조언하지 않는다. 그냥 듣는다.
어제 저녁, 그가 물었다. “나랑 사귀어서 좋아?”
나는 생각했다. 진짜 좋은가?
좋다. 힘들어도 좋다.
그는 내 일을 이해한다. 완벽하진 않지만 충분하다. 그는 내가 릴리즈할 때 축하해준다. 개발자랑 싸울 때 공감해준다. 기획자가 얼마나 외로운 직업인지 안다.
나도 그의 일을 이해한다. 캠페인 성과가 좋을 때 진심으로 기뻐한다. 광고 예산 깎일 때 화를 같이 낸다. 마케터가 얼마나 숫자에 시달리는지 안다.
우린 같은 세계에 산다. 비즈니스, KPI, 회의, 스트레스. 다른 직군이지만 같은 세계.
“좋아.” 내가 대답했다. “나도.” 그가 웃었다.
오늘도 우린 각자의 일을 한다. 그는 광고 대시보드를 본다. 나는 지라 티켓을 정리한다.
저녁에 만나서, 일 얘기를 조금 하고, 일 아닌 얘기도 하려고 노력한다.
완벽하진 않다. 그런데 충분하다.
같은 세계에 살지만,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과 산다는 것. 어렵지만 배운다.
